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(문단 편집) === 첫번째 집정관과 감찰관 ===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,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돌아온 뒤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로 하자 크라수스가 이에 질 수 없다고 여기고 선거에 뛰어들었다고 한다. 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불확실하자, 폼페이우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, 폼페이우스 추종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겨우 당선되었다고 한다. 아피아노스에 따르면, 두 사람은 로마의 권세를 놓고 다투기 위해 군대 해산을 거부하고 로마 시와 가까운 곳에 군대를 나란히 주둔시켰다. 이로 인해 내전이 일어날 기미가 보였지만, 로마 신관들의 설득을 받은 두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 화해하면서 위험이 사라졌다고 한다. 기원전 70년,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에 선임되었다. 두 사람은 독재관 술라가 내렸던 조치들을 모조리 취소시켰다. 호민관을 역임한 자는 다른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법을 폐지했고, 민회에서 통과된 법은 원로원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[[호르텐시우스 법]]을 부활시켰다. 또한 전문 법원에 원로원 의원만 배석시킨 술라의 조치를 파기하고 법원의 1/3은 원로원 의원, 1/3은 에퀴테스. 나머지 1/3은 에퀴테스에 속하지 않은 부유한 시민으로 구성하게 했다. 한편,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술라의 집권 이래로 오랫동안 선임되지 않던 감찰관에 [[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]]와 [[루키우스 겔리우스]]가 선임되었다. 두 감찰관은 전체 원로원 의원의 8분의 1에 달하는 64명을 원로원에서 제외시켰다. 이는 역대 감찰관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. [[테오도르 몸젠]]은 이에 대해 두 사람이 [[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]]가 구축한 체제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시킬 새 체제를 구성하길 희망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의중에 따랐을 것이라 추정했다.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뒤,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을 맡은 이는 속주 총독에 부임하는 관례를 거부하고 로마에 남았다.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, 로마에 남아서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외지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던 것으로 추정된다. 기원전 65년, 크라수스는 [[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]]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. 그러나 두 사람은 곧 갈등을 벌였다. 크라수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라틴 시민권을 부여받은 인구를 조사하던 중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역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. 또한 이집트의 전 파라오 [[프톨레마이오스 10세]]가 죽기 전에 "자신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"고 한 유언장 대로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삼자고 주장했다. 카툴루스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고, 크라수스가 뜻을 꺾으려 하지 않자 사임했다. 감찰관 한 명이 죽거나 사임하면 다른 감찰관은 무조건 사임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, 크라수스는 어쩔 수 없이 감찰관에서 물러나야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